사마천과 고조선의「범금8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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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과 고조선의「범금8조」
  • 김희만(헌책장서가)
  • 승인 201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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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만 - ‘헌책방의 인문학’(2)

가끔 산 책을 또 사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책이 좋아서이다. 다른 이에게 권하기도 한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은 그 수량이 한정되다보니 좋은 책(?)은 남 주기는 아깝고 더 소장하자니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그곳에 가면 대개 주인장이 친절하다. 커피를 포함해 이것저것 대접 받을 때도 있다. 책을 만져보다가 고민을 한다. 더 좋은 다른 좋은 책을 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기왕에 산 책이지만 손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참으로 정감 있는 헌책방의 풍경이 아닌가? 공감했으면 한다.
 
이윤기의『무지개와 프리즘』은 그런 책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 인간의 꿈과 진실에 대한 생각, 청년들에게 고하는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잔뜩 실려 있다. 익히 작가의 명성은 들어서 알 테지만, 명성만큼 다양한 글쓰기는 모범이 된다. 어느 부분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그런데 이제 만날 수 없으니 안타깝다. 내가 이 책을 또 산 것은 다시 보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이기도 하고, 어느 헌책방에서 나를 불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책에서 새로운 사실을 만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사마천의 궁형과 관련된 길지 않은 기사에 담겨진 내용이다.

* 필자 소개
김희만 : 한국사를 전공하였으며, 특히 정치사회사에 관심이 많다.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헌책을 좋아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책방을 뒤지고 다니는 헌책장서가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당시의 형법에 따르면, 사마천이 죽음을 면하는 방법은 다섯 가지 형벌 중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로 알려진 궁형(宮刑)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오형(五刑)이란, 이마에 글자를 새기는 자자형, 코를 베어버리는 의형, 발뒤꿈치의 아킬레스 힘줄을 자르는 월형, 자지를 자르는 궁형, 목숨을 빼앗는 대벽형, 이 다섯 가지 형벌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형인 대벽형을 면하는 길은, 그 바로 아래 단계의 벌인 궁형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궁형이 대벽형보다 가볍기만 한 벌인가? 많은 선비들은 궁형을 받고도 죽음의 길을 택했으니 실제로는 대벽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형을 면하자면 궁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궁형을 면하자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50만 전의 속량금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난한 태사령 사마천에게는 그런 돈이 없었다.”

빌려온 글이 너무 긴 듯하지만, 중국의 오형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천문학적인 금액이라는 50만 전의 속량금도 읽어볼 수 있다. 사마천은 그의 나이 45세 때 큰 변화에 직면한다. 이릉이라는 장수가 흉노족 정벌에 보병 5천으로 8만의 대군과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크게 패하여 포로가 되자, 당시 한무제는 이릉이 적에게 투항한 것으로 보고 죄로 다스리려고 하였다. 사마천이 이를 변호하다가 그만 인생의 고비를 맞게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나는 50만 전이라는 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내용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 지가 궁금하였다. 주변에 널려 있는 『사기』의 다른 책을 찾아보았다. 우선 이성규가 편역한 『사기』를 수소문하였다. 찾아진 책은 또 산 책 가운데 있었다. 이 책은 ‘중국 고대사회의 형성’이라는 부제를 달면서 방대한 『사기』의 읽어볼 만한 부분을 발췌하여 알기 쉽게 서술한 책이다. 특히, ‘편역자의 말’은 우리에게 왜 스승의 존재가 중요한 지에 대해 일침을 하고 있어, 일독을 권한다.

이 편역서에 보이는 50만 전과 관련된 내용을 들여다보자.

“진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하옥시키고 그의 처벌을 명하였다. 옥중에서 겪은 갖은 수모와 고초를 사마천은, 「손발이 나무 족쇄에 묶인 채 살이 터지도록 매를 맞았으며, 옥리(獄吏)만 보면 머리를 땅에 대고 옥리를 보좌하는 형도만 보아도 두려움에 마음이 떨렸다」고 회고하였지만, 그에게 내려진 판결은 무망죄, 이것은 요참(腰斬)으로 처벌될 죄목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50만 전 정도의 돈을 바치는 것, 또 다른 방법은 궁형을 자청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에게 가해진 형벌의 일부를 보여주면서, 여기에도 ‘50만 전 정도의 돈을 바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과연 이러한 이야기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더욱 궁금해서 원서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사기』와 『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거리면서, 장서가의 한심한 면모가 한숨으로 나오는 순간이다. 책의 행방을 모르는 것은 주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사실 사마천의 『사기』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한 책으로, 예전에 중국 북경의 책방에 들렀을 때 그 서점의 한 코너가 사마천과 『사기』로 채워져 있는 공간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지하듯이,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명을 이어 받아서 이 책을 완성하였으며, 기전체의 효시로 특히, 열전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관심이 많은 책이다. 이 책에는 사마천의 「태사공자서」와 「보임안서」가 담겨 있지만, 50만 전의 내용은 찾을 수 없고, 다만 그 내용을 통해 사마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사마천보다는 덜 익숙한 반고의 『한서』는 『사기』 이후 저술된 한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여기에 「사마천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을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거기에는 ‘집이 가난해서 가진 재산으로 속량금을 낼 수 없다’ 라고만 기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한서』를 천천히 다 뒤져서 그것을 밝혀내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책이 너무 방대하다. 그런데 완지생이라는 중국인이 「사마천의 마음」이라는 글에서, 이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학자의 양심(?)을 믿는 선에서 일보 후퇴하기로 한다. 혹시 강호제현께서 도움을 주시면 위안을 삼을 수 있겠다.

실제 이 부분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고조선과 연관된 기사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이 사라진 것은 아시다시피 한나라의 공격에 의한 멸망 때문이다. 그 당시 고조선의 역사는 패자의 역사로 인해 거의 남아 전하는 것이 없는 형편이다. 그 가운데 고조선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 「犯禁(범금) 8조」 이다. 이 기록을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상해를 입힌 자는 보상, 그리고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라고 하면서, 유독 이 부분만 단서 조항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속량금 50만 전이다.

고조선의 생활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였는데, 그동안 50만 전이 얼마나 큰 돈인지, 과연 일반인이 갚을 수가 있었는지 등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제 그 단서가 찾아지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 그런데 실제 고조선에서 도둑질을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의문이다. 그들은 부자였을까? 그런데 흔적은 항상 존재한다. 예나 지금이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부류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솔선해서 만든 법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도둑질을 변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마천이 그토록 갈망하던 50만 전과 고조선의 「범금8조」에 보이는 그 돈이 공교롭게도 같은데,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감당하기가 어렵다. 사마천의 궁형과 도둑질의 처벌 대가가 같은 반열에서 논의되는 것이 어찌 가당한가? 이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단언컨대, 사마천의 궁형과 고조선의 도둑질 운운은 결코 같은 역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상황에서 이해할 수도 없다. 어찌 생각하면 좋을지 묻고 싶다. 나는 할 말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저 책이나 보고 싶을 뿐이다.                
  

* 필자 소개
김희만 : 한국사를 전공하였으며, 특히 정치사회사에 관심이 많다.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헌책을 좋아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책방을 뒤지고 다니는 헌책장서가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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