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피크]
한국의 상인, 객주 서웅선 고택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를 상상하며 거리를 걷어본다. 강경읍의 가장 중심가라 할 수 있는 중앙리와 홍교리에 남아 있는 옛 건물들은 당시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장날의 강경 거리는 이른 아침부터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옹기장수, 짚신장수부터 항아리에 가득 담긴 각종 젓갈과 한산과 병점 그리고 안성 등지에서 온 유기와 모시 등이 길바닥을 가득 메우고, 각자 외쳐대는 구성진 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팔도의 소산이 모이고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니 복잡하고 정신없을 이 거리에 사람과 물산을 관리하여 혼란 속에 질서를 만드는 사람이 없을 리 없다.
1897년 공주부 관찰사 이건하가 강경 덕유정에 내린 『완문(完文)』을 보면 ‘강경포에 들어오는 각종 물건들은 강경의 여각 주인과 상인들이 관리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 여각이 바로 객주이다. 여각(旅閣) 외에도 저가(邸家)·저점(邸店)·선주인(船主人)이라고도 불렀다.
객주는 생산자나 상인으로부터 매매를 위탁받은 물건을 모아 모든 상인에게 유통하는, 초기의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좌상(坐商)이다.
고려시대부터 존재해왔던 객주는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권한이 매우 강력해졌고, 국가에서도 이들의 거래독점권을 인정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전라도 지방에서 곡물매매를 주선하던 객주는 국가의 특허를 얻은 37명이었고, 1890년 인천항 및 부산항의 특허 객주도 각각 25명으로 제한되었다.
그런데 객주의 독점권은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국 상인들에겐 눈엣가시와 같았다.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후에도 비록 독점권은 약화되었다지만 객주들이 여전히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충돌, 다른 말로는 탄압이 없을 수 없었다. 일제는 1935년 「어업보호취체규칙」이라는 걸 만들어 객주들은 탄압했다. 이 규칙의 골자는 어획물은 한곳에서만 판매해야 하고 해상에서 고기를 다른 배에 옮겨 싣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으로, 이를 강경과 마산에서만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업조합을 만들어 기존 객주 체계까지 바꾸려고 했다. 그렇지만 앉아서 당할 객주들이 아니었다. 상인들은 들고 일어났고 강경의 객주들과 연결된 전국의 수산물 도매상인들에게 어업조합에서 고기를 사가지 않도록 당부하는 등 거기에 맞섰다. 당시 뱃사람들과 도매상들이 객주들의 지시에 따름으로써 결국 객주들의 승리로 끝났다.
거의 무소불위의 힘으로 조선 땅에 밀려들던 일제에 맞서 얻어낸 승리는 객주들이 배, 사람, 거래권, 재정 등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 주변에는 그 찬란하고 풍요로웠던 객주의 흔적이 온데간데없다. 집요한 일제의 침탈과 계속된 전쟁과 갑자기 밀려든 문물에 하나둘씩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북옥리 99-3번지에 있는 객주 서웅선 고택은 교역 독점권을 가지고 강경 상권을 지배했던 객주의 마지막 남은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주인은 고택 뒤에 새로운 집을 지어 살고 있어, 객주 관사는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 가을 저녁 무렵 찾아간 객주 고택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핀 지붕 기와 사이로 무상하고 거친 세월만이 쓸쓸히 불어왔다.
가는 길 : 지도를 보고 봉선사 뒤에 자리한 객주 고택을 찾아가긴 조금 어렵다. 중앙리 거리에서 옥녀봉 올라가는 골목, 즉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골목 입구에서 북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작은 골목길이 나온다. 골목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오른쪽으로 조금 걸으면 고택이 나온다.
아직도 든든한 옛 강경노동조합
강경읍 중심가 바로 아래에 젓갈시장과 전통시장이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강경의 당시 영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가 조선 노동자들과 객주의 의기를 보여주는 옛 강경노동조합 건물이다.
일제가 조선에 손을 뻗기 시작하고 강경에 철길이 이어지면서 하역 노동자를 중심으로 온갖 사람들이 이 작은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한 이들은 그 누구보다 억세고 질긴 사람들이었다. 또한 조선의 삼대 시장이라 불릴 만큼 팔도의 사람과 물산이 모이던 강경이라, 이곳에서 터를 잡고 있던 객주들의 자부심은 여타 도시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슬그머니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해대는 일본인들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들에게는 총이 있고, 군대가 있으니. 그렇대도 참을 수 없는 일은 조선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도도한 객주와 떠돌아다니던 하역 노동자가 모여 하나의 힘과 목소리를 내기로 뜻을 모았다. 이로써 1910년 중반 약 4백여 명의 조합원이 모인 강경노동조합이 탄생했다.
구성과 만들어진 배경만 보아도 이 노조는 점차 침탈해 오는 일제 상인들에 맞서 조선 어민과 상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객주이자 초대 조합장이던 정흥섭이 솔선수범을 하였다. 그가 사재를 털어 조합 건물을 짓겠다고 나서자, 조합원들도 십시일반 거들기 시작했다.
무려 5천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굉장한 거금이 든 2층 기와집, 여기저기에 새로 들어서는 일본인들의 근대 건축물에 뒤지지 않는 그럴듯한 조합 건물이 세워진 것이다.
조합원이 많을 때는 2~3천 명에 달했다고 하니, 이 숫자가 당시 강경에서 어업 관계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전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에게 이 조합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상징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준공 당시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대흥천변에 있었다. 1층은 전체를 개방해 사무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2층에는 2개의 방이 있었으며, 계단은 현관으로 들어서면 왼쪽 벽면에 붙은 직선 계단으로 처리하였다. 해방 이후 방치되어 2층이 점차 무너져 내리면서 1층만이 남았는데 그마저도 젓갈 창고로 쓰다, 문화재로 등록된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 개축하였고 한다.
강경역사관이 된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옛 강경노동조합 주변에 붉은 벽돌로 된 멋들어진 건물이 한 채 나온다. 지금은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단숨에 과거로 이끌어주는 여러 물품들과 함께 즐거운 목소리들이 반긴다.
“엄마, 이게 뭐야?”
“어, 그건 ‘미싱’이라는 거야! 엄마 어렸을 땐 이걸로 옷도 만들고 했단다.”
“우와, 진짜? 어떻게 만드는데? 나도 이걸로 옷 만들어줘!”
“아빠, 이건 뭐예요?”
“응, 그건 ‘곤로’라고 하는 거야. 옛날에는 이걸로 국도 끓이고 밥도 해먹었지.”
“어떻게 불이 붙어요?”
“이 밑으로 기름을 넣으면 돼. 그리고 저기 튀어나와 있는 거 보이지? 거기를 들면 심지가 있어. 거기에 불을 붙이면 되는 거야!”
예닐곱 된 아이들은 하나하나가 신기한지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바쁘고, 엄마와 아빠는 어렸을 때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예전 물건들에 대해 설명한다. 부모는 추억에 잠기고, 아이들은 부모의 시간으로 신기한 여행을 떠나온 셈이다.
요즘은 모든 도시에 작든 크든 박물관이 하나씩 존재한다.
근대의 시간을 간직한 강경이니만큼 쌓여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적지 않을 테니, 근대의 물품으로 빼곡히 들어찬 ‘강경역사문화관’이라는 작고 옹골찬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건 당연하다 하겠다. 그렇지만 강경역사문화관은 당연하다고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자신만의 독특함을 적어도 두 가지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 공간이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건물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조선 최대의 상업도시 중 하나로 강경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그에 걸맞게 상거래를 원활하게 뒷받침하기 위한 금융업의 진출도 두드러졌다. 1905년 자본금 50만환의 한호농공은행 강경지점이 설립되었고, 1911년에 한일은행 지점이 전국 최초로 설치되어 금융 업무를 개시했다.
이 조선 은행들은 커다란 건물을 지어 일제 식산은행이나 금융조합에 맞서 그 자본력과 위용을 드러내고자 했다. 1913년에 붉은 벽돌 건물로 신축된 한일은행 강경지점 건물은 그러한 의도에 부합하는 건물로 웅장하게 등장했다.
건물의 위용에 걸맞게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1927년 예금・대출 총액 1,915,563원을 달성해, 일제 식산은행 예금・대출 총액 2,264,462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당시 강경이 지닌 풍요로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고, 이 은행으로 몰린 조선 사람들의 의기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은행과 달리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본관 옆에 커다란 창고가 있어 객주 등이 담보로 제공하는 수산물을 보관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인과의 거래를 바탕으로 조선인 상업과 어업을 보호하며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도시가 흥망성쇠를 거치니 은행 또한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1931년 1월 21일 호서은행과 합병해 동일은행으로, 1943년 10월 조흥은행 강경지점으로, 해방 후에는 충청은행 강경지점으로 여러 차례 그 주인이 바뀌었다.
결국 강경의 상권이 크게 축소되자 은행은 떠나고, 건물은 도서관과 젓갈 창고로 쓰이는 우여곡절 끝에 2007년에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강경역사문화관만의 또 다른 독특함을 만나게 된다. 그건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하고 운영한다는 것이다. 작은 소도시에서 자신들의 삶과 그 시간을 간직한 물품들을 모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또 공간을 마련해 전시를 하고 운영을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강경 사람들은 이 역사관을 만드는 데 관심과 참여를 아끼지 않았고, 개관 1년 만에 3만 명이나 다녀가는 성과도 거두었다.
탄탄한 은행을 꾸리고, 그 건물을 보존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시간과 물품을 오롯이 꾸며놓은 것을 보면, 강경 사람들의 단단하고도 자립적인 삶과 자긍심이 마음을 가득 채워오는 것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