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문화로, 놀이를 예술로, 그림자극의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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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문화로, 놀이를 예술로, 그림자극의 새로운 시작!
  • 윤민 기자
  • 승인 2021.0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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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형극의 멘토를 찾아서’ 2 - 현대 한국 그림자극의 자부심, 극단 영

[뉴스피크] 어느 분야나 장르에서는 대표하는 단체나 극단 그리고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건 오랜 세월 그 일을 해온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없던 것을 보고 개척하고, 거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한국의 그림자 인형극에서 〈극단 영〉이 차지하는 역할이 그와 같지 않을까?

▲ 이정민 대표와 극단원이 새로운 공연의 캐릭터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뉴스피크
▲ 이정민 대표와 극단원이 새로운 공연의 캐릭터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뉴스피크

추억과 예술의 공감과 간격, 그림자극

중장년의 세대에게는 누구나 그림자극의 추억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통금이 있고, 전기가 불안했던 시절, 방에 밝혀진 촛불이나 이불로 가려진 방안의 흐릿한 백열등 앞에서 여우와 토끼 등을 만들면서 놀았던 기억이 그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림자극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편안하고, 대중적인 놀이 정도로 생각되었던 게 사실이다.

▲ 그림자극을 위한 다양한 소품들. ⓒ 뉴스피크
▲ 그림자극을 위한 다양한 소품들. ⓒ 뉴스피크

하지만 예술로서 한국의 그림자극은 추억의 시작과 끝이기도 하지만, 또 전혀 다른 영역이기도 하다.

그림자극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기원전 200년 기록에 '그림자극'이라는 말이 언급되었다. 문헌상으로는 제일 오래된 기록이니 많은 학자들이 그보다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이라 예측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긴 역사만큼 집과 동네 그리고 나라의 놀이이자 유희였던 그림자극은 점차 다양하고, 전문화되었을 것이다. 중국은 송나라 시절에 그림자극 전문 관리가 있었을 정도였으니  다양해진 만큼 전문화되고 대중화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때쯤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그림자극이 만들어지고 공연되었다. 10세기 터키에서 <카라 쿄즈>라는 그림자극이 탄생했고, 같은 시기에 인도네시아에서는 <와얀>이라는 그림자극이 탄생했다. 그리고 16세기의 유럽에서도 그림자극을 공연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는 자신이 직접 쓴 극본으로 그림자극을 공연했다고 하며, 당시 독일과 유럽에는 그림자극 전문극장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고 하니 시대를 풍미했던 공연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우리나라 역시 고려시대부터 그림자극이 있었고, 그 전통과 기예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특히, 불가에서는 <만석중놀이>를 그림자극으로 만들어 석가탄신일에 사찰에서 공연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우리의 전통 대부분이 그렇듯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림자극의 기예와 문화는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저 추억으로만, 집안의 놀이로만 남겨지게 된 것이다.

 
▲ 그림을 그리고, 본을 만들고, 캐릭터를 만든다.  ⓒ 뉴스피크
▲ 그림을 그리고, 본을 만들고, 캐릭터를 만든다. ⓒ 뉴스피크

사라졌던 공연으로서의 그림자극, 그리고 현대 한국의 그림자극은 84년 극단 영의 <성냥팔이 소녀>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사실 극단 영은 82년 창단되었다. 그리고 창단공연까지 2년이 걸렸다. 바로 그림자극을 찾고, 배우고 전통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필요했던 최소한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당시 방송 인형극으로 유명했던, 지금은 현대 인형극의 일 세대라 불리는 강승균 선생은 극단 영을 창단했지만 한국에서 그림자극을 배우거나 참조할 만한 곳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완전히 그 맥이 단절된 것이다. 결국 강승균 선생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자극을 배웠고, 자신의 경험을 거기에 더해 2년 만에 한국 최초의 그림자 인형극이자 극단 영의 창단 공연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대, 또 다른 문화와 전통

무려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 만든 토대 위에 수많은 공연과 경험을 통한 발전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이제 한국의 그림자극을 이야기할 때 극단 영을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까지 극단 영은 인형극, 뮤지컬, 마당놀이극 등 창작극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아동극 1만6천여회 공연으로 2백여만 관객을 만났다.

그 관록의 극단 영이 오랜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부천에 새롭게 터를 잡았다. ‘새 술은 새 부대’라는 말처럼 이사를 오면서 극단 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비우는 일이었다.

2.5톤 차량 2대분의 짐을 이정민 대표의 말처럼 화끈하게 버리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 그림자극을 위한 소품들. ⓒ 뉴스피크
▲ 그림자극을 위한 소품들. ⓒ 뉴스피크

대부분의 인형극단은 짐들이 많다. 수많은 소품을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만든 인형, 그 이야기와 관계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극단 중 하나인 영은 왜 그 많은 기억들을 버릴 수 있었을까?

그건 아마 시대가 빠르게 바뀌고 있음을 말해주고, 발 빠르게 그에 대응하기 위한 극단 영만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격하게 변하는 그림자극의 풍경과 환경이다.

“일단 아날로그는 나무가 필요해요. 디지털은 나무가 노트북 안에 들어가 있죠. 그러다보니 짐이 너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공연이면 탑차로 이동했어야 했는데, 이제는 스타렉스로 이동하고 있어요. <마술피리>라는 작품을 공연할 때에는 스크린을 세 개나 사용했었죠. 세트와 그림자용 특수사각조명과 일반 조명 거기다가 인형까지 함께 움직였어요. 게다가 1시간 동안 연기를 하면서, 조명도, 배경도, 세트도 계속 바뀌다보니 공연 내내 30초도 못 쉬는 상황이 계속 되었죠. 모두 사람의 손에 의해 장면과 모든 것이 바뀌기 때문이었고, 그게 아날로그 시대의 풍경이었어요.”

▲ 극단 영의 이정민 대표. ⓒ 뉴스피크
▲ 극단 영의 이정민 대표. ⓒ 뉴스피크

배우는 스태프이기도 했다. OHP와 조명을 달고, 자기 인형까지 챙겨야 했다. 연습시간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동선이 많고, 복잡하다보니 당시 스태프들은 자신의 할 일을 적은 목걸이를 차고 다닐 정도였다. 거기에는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시간별로 장면별로 적어놓았다고 한다. 그 작업표를 보면서 분과 초에 쫓겨 뛰어다니는 극단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지만 변화가 항상 답일 수는 없다.

이정민 대표가 극단 영과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동안 옆에서는 최진희 실장님과 디자이너가 열심히 본을 뜨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대표의 이야기를 듣던 실장님이 한마디를 보탠다.

▲ 그림자극을 위한 멘토링이 진행되고 있다. ⓒ 뉴스피크
▲ 그림자극을 위한 멘토링이 진행되고 있다. ⓒ 뉴스피크

“근데, 그때 했던 작품이 더 좋았다고 배우들은 이야기해요.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기도 하고, 디지털 색감 예쁘고 다양하지만 오래보면 질리는 느낌도 있어요. 그에 비해 아날로그의 빛은 따스한 느낌이 있죠.”

이 대표 역시 각기 장단점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변화는 시작되었다. 어쩌면 아날로그 시대를 마치고, 디지털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새로운 공간에서의 시작으로 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에 멘티들이 이 대표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새롭게 인형극을 시작하려는 새내기들이다. 마침 각자 동화를 원작으로 한 대본을 써오는 숙제를 제출했고, 오늘은 그 이야기와 함께 캐릭터를 그리는 작업을 해볼 계획이라고 한다.

먼저 ‘빨간모자’의 대본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그림자극의 창의인재 멘토링. ⓒ 뉴스피크
▲ 그림자극의 창의인재 멘토링. ⓒ 뉴스피크

“직접 다 썼어요? 대상은 어디로 생각하고 썼나요? 인형극 최근에 본 게 있나요?”

몇 개의 질문을 던진 잠시 고민을 하던 이 대표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빨간 모자 대본으로 그림자극을 만들 수는 있어요. 하지만, 80년대의 고전 대본이에요.

대본에 창의성이 보이지 않아요. 연습이든 뭐든 대본을 쓸 때는, 각색을 하는 것이에요. 각색의 기본은 제2의 창작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정욱현의 ‘빨간모자’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이 대본은) 모든 이들의 빨간 모자에요.”

 

정확한 과제의 의미를 그제야 알아들은 멘티가 이제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다면서 본격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 시작하자 토론은 일방에서 쌍방으로 더욱 깊고,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 조금 막막해하던 멘티들은 멘토링이 진행되면서 점차 적극적이고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 뉴스피크
▲ 조금 막막해하던 멘티들은 멘토링이 진행되면서 점차 적극적이고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 뉴스피크

“남들이 하는 걸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어요. 기본 원작을 가지고 대본을 만든다 할 때의 첫 번째 원칙은 ‘자기화’예요. 따라하되, 아무도 하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죠. 두 사람 (모두 각기) 원하는 식이 있을 것이고, 그걸 서로 맞춰가는 방식으로 진행할 계획이에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신효림만의 ‘여우와 두루미’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고민이 제법 그럴듯하고 재미있게 흘러나온다.

늑대는 육식인데, (먹을 것을 찾고 먹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야비한 수를 썼다. 속여서 할머니에게 갔다는 게 아닐까?  (빨간모자)

두루미가 음식을 못 먹고, ‘너도 당해봐라’ 하는 이야기인데, 사실 대왕 두루미의 날갯짓 한 번이면 여우는 도망간다고 한다. 또 두루미는 긴 호리병보다 납작한 것에 먹을 때 더 잘 먹는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면 동화가 처음부터 이해와 몰입이 잘 되지 않는다.

그렇게 엉뚱하지만 진지한 모색과 질문과 답이 이어지면서 토론은 깊어진다. 서로의 이해와 함께 공연의 형태에 대한 공유가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각자가 만들 이야기의 얼개와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그들만의 이야기로 창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앞선 이야기들의 다양한 그림이 그려지고, 다시 그림자극을 위한 캐릭터들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선이 그려지고, 붙여지고, 다시 오려진다. 그렇게 창조된 그림자극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공중에 매달려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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