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방 전성시대와 조선의 조리서

[역사와 스토리텔링02] 고조리서가 꿈꾼 세상

2020-06-25     윤민, 이지현 기자

[뉴스피크] 

끝나지 않는 먹방 전성시대 

 

2015년 1월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먹방 전성시대’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물론 그전에도 채널마다 다양한 먹거리 관련 프로그램이 유행했지만, 아무래도 지금과 같은 좀 더 전문적이고, 전폭적인 흐름은 그때 본격화된 게 아닌가 싶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제 피로할 때도 됐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여전히 백종원은 새로운 음식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있고, 먹방은 방송을 넘어 유튜브까지 그 분야를 확장하고 있다.

이제 먹기 위해서 여행하고, 좋은 식당과 음식이 곁들이지 않는 모임은 좋은 평을 받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사실 음식방송은 사실 ‘푸드 포르노’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방송가의 효자 상품으로 예전부터 정평이 난 장르였다. 모든 것이 망해도 일단 먹는 방송은 기본 시청률은 보장한다는 속성 때문에 방송가는 너도 나도 먹방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방영해 왔다. 

 

물론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아무리 중요한 문제가 앞에 있어도 인간은 먹어야 산다. 그리고 맛있는 것을, 또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좋은 음식을 먹기를 바란다. 이 때문에 먹방은 모든 시청자들에게 두루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에 대한 집착은 언제부터였을까’ 라는 질문을 문득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요리라는 게 하나의 도락과 탐닉으로 우리 주변에 자리 잡은 것은 언제부터일까? 우리 대한민국의 요리는 그 역사만큼 깊고도 넓다. 다양한 요리가 만들어지고 전승되는데, 지금의 먹방과는 다른 모습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역시 없지 않다. 과연 시간을 한 500년쯤 돌려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니 살림을 주관했던 조선의 여인들은 물론, 선비들마저도 음식에는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먹방 시대의 시작은 어쩌면 조선에서부터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 전기의 요리법

 

수원잡방 ⓒ 안동시

옛 전통요리의 조리법을 기록한 책을 일컬어 ‘고조리서古調理書’ 라고 한다. 조리調理 라는 명칭에서부터 사실 요리와 음식에 대한 선조들의 애정이 듬뿍 느껴진다. ‘이치를 조화롭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생각한 요리였던 것이다.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고조리서는 1400년대 중반 어의를 지낸 전순의 선생의 《산가요록》이다. 이 책은 작물·원예·축산·양잠·식품 등을 총 망라한 농서(農書)이면서 술·밥·죽·국·떡·과자·두부 등 229가지의 조리법을 수록한 음식책인데, 주로 한양 중심의 요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이 중종 때인 1540년경 안동의 유학자인 김유 선생이 쓴 《수운잡방 需雲雜方》인데, 대표적인 고조리서로 꼽는다. 《수운잡방》은 조선 전기의 다채로운 요리법 87가지를 기록하고 있다. 후대에 김유 선생의 손자인 김령이 35가지를 더해, 총 121가지의 음식 조리법이 쓰여 있다. 

살림을 하지 않는 유학자가 직접 요리책을 쓴다는 게 사실 조금 놀라운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유학자들의 풍류와 탐구는 《산가요록》처럼 농사와 삶 그리고 자연에까지 광범위하기만 하다. 그리고 ‘수운’은 격조를 지닌 음식문화를 뜻하고, ‘잡방’은 여러 가지 방법을 뜻하니, 제목 그대로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게 걸맞은 요리를 만드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기록을 중시한다.

일찍이 공자가 역사서인 《춘추》를 저술하는 것을 통해 본을 보인 탓이다. 조선왕조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엄밀한 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남긴 것도 모두 조선이 유학자의 나라였던 덕인 것이다. 유학자들의 풍류와 꼼꼼한 기럭 덕분에 우리는 조선 전기부터 이미 매우 과학적인 형태의 조리서를 간직하게 된 것이다. 

 

 

한글에 담은 조선 중기의 요리법, 《음식디미방》

여중군자 장계향. (영양 두들마을 음식디미방 체험관) ⓒ 뉴스피크

조선은 통일신라나 고려에 비해 남녀 차별이 심했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유교적 신분질서 아래 여성들은 삼종지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 조선에서 선비들에게도 드문 ‘군자’라 불린 드물고도 드문 여성이 있다. 장계향이다. ‘여중군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그 자신이 상당한 유학적 지식과 인품을 겸비했던 장계향 선생이 73세의 나이에 평생 동안 갈고 닦은 요리의 비전을 후대에게 전하기 위한 뜻으로 기록한 것이 《음식디미방》이다. 

조선 중기의 조리를 기록한 《음식디미방》은 조리를 실제로 담당했던 여성이, 한글로 기록한 아시아 최초의 고조리서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장계향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익혀, 이미 한문의 대가였지만 일부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기 위해 한글로 조리서를 썼다고 전한다. 또한 평생 동안 여러 요리들을 만들며 실험적으로 새로이 만든 요리들도 담아 놓았기에 고조리서로서의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게다가 그 기록이 너무도 상세하기에 오늘날에도 재료만 구해진다면 곧바로 구현이 가능한 수준이다. 

음식디미방 체험관. 음식디미방의 글씨체를 집자하여 만든 간판. ⓒ 뉴스피크

실제로 장계향 선생이 살았던 경북 영양 두들마을에서는 《음식디미방》을 되살리고,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체험관이 있다. <음식디미방 보존회>가 있어 책을 바탕으로 옛 음식을 오늘에 맞게 구현하고 있으며, 그중 몇 가지는 방문한 이들을 위해  오늘날 직접 먹어볼 수 있게 제공도 한다.     

 

《음식디미방》과 《수운잡방》 사이에는 약 100년의 격차가 있다. 두 고조리서 간에는 이런 시대의 차이 외에도 또 다른 차이가 존재한다. 《수운잡방》이 시중의 보편적인 요리법들을 집대성한 일종의 조선 요리입문서라고 한다면, 《음식디미방》은 보다 독특한 별미들을 소개한 중고급 요리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음식디미방》에서 다루고 있는 요리의 재료 중에 ‘꿩’과 같은 것은 당시에도 구하기 어려운 식재였다. 

영양 두들마을 음식디미방 체험관에 있는 다양한 자료. ⓒ 뉴스피크

《음식디미방》과 요즘은 다시 350년의 시간차가 있다. 그 안에 전복, 자라 참새 등 요즘엔 사용하지 않는 요리 재료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책에 상세히 나와 있는 요리법을 따르면 현대인에게 너무 싱겁다는 게 먹어본 이들의 한결같은 이야기이다.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건강식이지만, 이미 새콤달콤매콤한 음식에 적응된 우리들에게 고조리서가 담고 있는 풍류와 맛은 너무 담백하기만 한 것이다. 

 

홍길동전의 저자가 남긴 조리서 

 

그렇다면 조선에서 오늘날의 백종원에 비견되는 탐식가이자 요리연구가의 대표를 꼽자면 누가 있을까. 놀랍게도 조선의 대표적 탐식가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 선생이었다. 허균 선생은 《도문대작》이라는 저술을 통해 조선 유학자들이 음식문화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며, 생명과 직결된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소부부고 가운데서 ≪도문대작≫ 편. 1611년 허균이 우리 나라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책. 1권 1책, 필사본. 규장각도서. ⓒ Public Domain

총 26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쓰인 《도문대작》은 본격 요리품평서로 허균 선생이 전북에 유배되었을 시기에 쓰여졌다. 귀양지에서의 거친 음식을 먹게 되자 전에 먹었던 좋은 음식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은 것이며, 조선 팔도의 117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별미 요리와 명물 토산품을 기록한 매우 귀중한 책이다. 

거기에는 병이류 11종목, 채로와 해조류 21종목, 어패류 39종목, 조수육류 6종목, 기타 차, 술, 꿀, 기름, 약밥 등과 서울에서 계절에 따라 만들어 먹는 음식 17종의 별미음식과 명소가 서술되어 있다. 

도문대작이라는 이름은 푸줏간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뜻인데, 조조의 셋째 아들이며 시인인 조식이 쓴 “푸줏간 앞을 지나며 크게 입맛을 다시는 것은 비록 고기를 얻지 못해도 마음이 귀해지고 통쾌해서이다”라는 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조식의 유머와 허균의 곤궁한 처지가 만나 한 권의 요리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에 허균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내가 바닷가로 유배당했을 때 쌀겨도 부족하여 밥상에는 상한 생선, 감자, 들미나리 따위가 올라왔다. 그조차 끼니마다 못 먹어 굶주린 채 밤을 지샐 때가 많았는데, 지난날 산해진미도 물려 먹기 싫어하던 때를 생각하며 침을 삼기콘 하였다. 다시 먹고 싶었지만 하늘나라 서왕모의 복숭아처럼 아득하게 멀리 있으니,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은 동방삭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음식별로 나누어 정리하여 가끔 보면서 한 점의 고기로 삼고자 하였다.”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허균이 칩거 중 저술한 시와 산문을 정리한 초고) 

『도문대작』은 특히, 허균 자신이 직접 그곳을 찾고 음식을 맛본 것이다. 따라서 간략한 해설이지만 식품과 음식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를 거치면서 유학자들이 각자의 가치를 담은 음식에 관한 기록은 이제 당시의 생활과 풍류를 알 수 있는 다시없는 가치가 된다. 그 고조리서는 다시  조선 후기인 1800년대 서울의 빙허각 이씨가 집필한 생활백과사전 《규합총서》로 이어지고, 1800년대 후반 다시 《시의전서》로 계승된다.

꾸준히 쓰여진 고조리서 덕분에 조선 500년의 삶을 풍성하게 했던 요리들이 귀중하게 이어져 올 수 있었다. 1900년대 근대 이후로는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등 다양한 신식 요리서들이 출간되기 시작되고, 이는 현대의 다양한 먹방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다만, 고조리서가 담고 있는 풍류와 건강 그리고 삶과 자연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 요즘 먹방에도 유지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