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을 쓴 기생'과 금관총 그리고 서봉총

경주의 신라고분에서 만난 웃픈 역사

2020-06-04     윤민 기자

[뉴스피크] 경주의 유적지와 문화유산은 우리 역사를 넘어 세계인이 찾고, 감탄하는 역사 공간과 문화가 되고 있는 듯하다.  

경주의 곳곳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의 감탄어린 표정을 보면 문득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생각난다. 전라도에 있던 고등학교는 강원도에서부터 다시 전라도로 돌아오는 수학여행 일정을 매년 반복했는데, 강원도 설악산과 동해안을 거쳐 포항과 경주를 필수코스로 삼았다.

건전한 열정과 약간의 일탈은 경주에 도착한 젊은 청춘을 노곤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당연히 아무런 흥미와 자극이 없는 거대한 고분은 너무나도 교육적이면서 지루한 관광지일 수밖에 없었다.

전날 무리한 몇몇은 버스 안에서 취침으로, 그나마 기운이 남는 몇몇은 주변 기념품 가게에서 선물을 사는 것으로 대릉원 관람을 마치기 마련이다. 당연히 불국사의 기념사진 외에는 특별한 추억이랄 게 없는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경주 대릉원 건너편에도 한적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곳 역시 신라의 고분군이 모여 있는 곳으로 금관총, 서봉총 그리고 봉황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봉황대는 주변 나무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 뉴스피크

20여 년이 흘렀다. 제법 묵직한 카메라를 가지고 다시 찾은 대릉원과 경주의 골목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그 고즈넉함과 소소한 아름다움이라니. 그렇게 풍경에 감탄하고, 사진에 열중하다보니 경주는 이제 제법 괜찮은 여행지로 기억에 새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내가 다닌, 그리고 다닐 여행지와 공간에 대해 추억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경주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 그저 그럴듯한 배경으로만 보이던 거대한 무덤들은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 가장 특별했던 것은 한 장의 오래된 신문기사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1936년 6월 29일자 부산일보는 금관을 착용하고, 금목걸이와 귀걸이 등 신라시대 귀족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기생의 사진을 3단 기사와 함께 내보냈다. 일제강점기였지만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기생이 착용한 황금 장신구가 실제 신라왕의 무덤에서 나온 진품이었고, 그걸 기생이 착용한 채 술자리의 여흥으로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라고 하지만, 아니 일제강점기였기에 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면 당시 신라왕의 유물은 우리 국민들에게 어떤 의미였고, 또 그 유물들은 어떻게 기방에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을까? 그 이야기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처음 고분이 발굴되던 때로 가야만 한다. 

금관으로 치장한 기생을 기록한 당시의 신문기사. 겉으로는 예의바른 일제의 본모습이 거기에 투영되어 있다. ⓒ 뉴스피크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9월 23일 경주 노서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이가 뒤뜰을 확장하기 위해 뒤편 언덕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을 지나던 경주경찰서 순경이 “아이들이 묘지에서 나온 신기한 구슬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즉시 공사를 중단시키면서 역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며칠 뒤인 9월 27일 경주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 모로시카 히로오와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 고적보존회 촉탁 와티리 후미야 등이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단지 경찰서장이 지켜볼 뿐이었던 비전문가들의 발굴은 4일 만에 종료되었고, 거기에서 순금제의 금관(국보 87호)이 출토되었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전세계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금관이 발견된 적이 없었고, 금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릴만한 것도 몇 점 되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그들은 후다닥 눈에 보이는 유물만을 수습하고는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금관총’의 이름을 명명하고 무덤을 덮어버렸다. (우리의 고고학자들은 계속된 재발굴을 통해 그들의 발굴이 얼마나 성의 없고, 예의 없었던가를 확인하고 있다.) 

재발굴됨으로써 본래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금관총. ⓒ 뉴스피크

그런데 그렇게 발굴된 유물들의 양과 가치가 대단했고, 당시 경주에는 전시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총독부는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경주읍민들은 거세게 반발하면서 성금을 모아 금관총출토유물전시관을 기증하기까지 하였다. 

더욱 놀랄 일은 그 와중에 경찰서 뒤편에 보관 중이던 금관총의 유물들이 하룻밤 사이에 도난당한 것이다. 수사도 오리무중이었고, 그렇게 유물이 사라진지 6개월이 지나버렸다. 그러던 1928년 5월 아침, 유물들이 경주경찰서장 관사 앞에 보자기에 담긴 채 다시 나타났다. 

거기에는 순금 허리띠(국보 88호)를 비롯한 도난 유물이 대부분 들어 있었지만 허리띠에 매달린 길쭉한 드리개 하나는 사라졌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다급해진 것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신문에 광고를 한 유물에 저주가 걸려있다는 이야기에 놀랐을 수도 있다. 

다만, 유물이 돌아온 후에 당시 경주박물관장으로 금관총 발굴 당시 일부 유물을 빼돌렸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가 유력한 범인이었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표지석으로만 남은 서봉총. ⓒ 뉴스피크

그런 사건들이 이어지는 동안 경주는 또 하나의 놀라운 고분이 발견되었다. 1926년 당시 경주에서는 대능원 뒤를 지나가던 철도를 다른 곳으로 이설하고 현재 있는 경주역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공사장에 필요한 흙을 커다란 언덕에서 파내면서 고분이 발결된 것이었다. 이미 고분 주위에 들어선 민가들에 의해 봉분은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고이즈미〔小泉顯夫〕등이 발굴하였는데, 고분을 발굴한 뒤에 원래대로 둥글게 봉토를 하지 않고 약 50센티미터 정도로만 흙을 돋운 뒤 그냥 평토분으로 남겨둔 곳이라 그냥 지나치던 곳이었다. 

그저 성의없다라고 넘어가기에는 우리 마음에 오래 남는 이야기가 평범한 고분 안에 숨겨져 있다. 그중 하나가 서봉총 이름이 만들어진 이유이다. 

서봉총 발굴이 한참일 때 마침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와있었다. 한국을 자기 땅이라고 서양에 선전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지 일제는 유물 발굴의 마지막을 진행하지 않고 굳이 구스타프 황태자를 그곳으로 불러 그의 손으로 금관을 들어내는 정치적 연출을 하였다. 이에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의 ‘서(瑞)’ 자와 고분 출토 금관의 봉황(鳳凰)장식에서 ‘봉(鳳)’ 자를 따서 서봉총(瑞鳳塚)이라 이름이 만들어지니 예쁘지만 마음이 불편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구스타프 황태자의 이야기와 당시의 장면이 남겨진 표지판. ⓒ 뉴스피크

그렇게 발굴이 끝나고, 1935년 9월 평양박물관은 서울에 보관중인 서봉총 출토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를 대여 받아 특별 전시를 열었다. 그런데, 이 전시회가 끝나고 유물들이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술집에서 다시 한번 특별전시회를 개최하니, 그 소식이 우연찮게 신문에까지 흘러들어간 것이다.

덕분에 기생(妓生)은 신라의 황족이 되고, 박물관장은 황족의 유희를 즐기는 이가 되어 버렸다. 소위 박물관장이라는 사람이 유물을 이렇게 다루는 것도 놀랍지만, 일제가 우리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건이었다. 비록 고이즈미 관장은 이 사건으로 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졸지에 봉변당한 역사는 회복할 길이 없다. 

그런데, 서봉총을 위에서보면 표주박 형태의 고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뒷쪽(북쪽)분이 봉황 앉은 금관이 출토된 서봉총이고, 같이 붙은 분(墳)의 남쪽분은 '데이비드총'이라 불려 왔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두 고분 모두 서봉총으로 부르고 있다. 

서봉총 발굴의 담당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서봉총을 발굴하면서, 남쪽에 인접해 비슷한 규모를 가진 1기의 고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물이 계속 발굴되던 시대였기에 이 ‘남분’에서도 큰 유물이 발견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총독부로부터 경비 지출을 거부당했다. 

그로부터 약 4년 후인 1929년 9월, 상해에 살고 있는 유태계 영국인으로 아시아 고고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퍼시벌 데이비드 경이 3천 엔의 발굴비용을 제공하면서 남분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막상 고분을 발굴한 결과, 각재를 쌓아 만든 목곽은 완전히 부식되어 흔적도 없고 그 중앙에 놓아둔 목관의 바닥 부분이 간신히 확인될 뿐이었다. 유물 또한 목관의 중앙에 순금제 이식을 늘어뜨린 귀걸이와 큰 곡옥을 장식한 목걸이, 몇 개의 은 및 금동의 팔찌, 금은의 반지 등이 있었을 뿐이었다.

찬란한 금관 등을 기대했던 이들은 결국 발굴한 이의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총'이라고 명명하고 무덤은 다시 흙으로 덮어 버렸다. 게다가 이 고분에 대한 발굴기록은 현재 행방불명이며 일본·한국 어느 쪽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발굴 당시의 사진만 몇 장 남아있을 뿐이다. 

서봉총의 남분과 북분은 이래저래 역사적인 부끄러움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그런 풍상 속에서도 대릉원 위쪽의 금관총과 서봉총으로 이어지는 공원의 고즈넉함과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그저 그 아름다움과 역사의 기억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랄 뿐이다.   

대릉원 일대의 지도. 대릉원이 삼국유사가 남긴 전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대릉원 위쪽의 고분군과 공원은 일제강점기의 안타까움이 새겨진 역사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 뉴스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