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의 풍경과 사람들 3
예학의 든든함이 만든 풍경 - 죽림서원, 임이정, 팔괘정
[뉴스피크]
김장생과 죽림서원 그리고 예학
강경읍을 제일 넉넉하게 볼 수 있는 곳이 금강변에 위치한 황산전망대이다. 그곳에서는 넉넉한 금강과 아담한 강경읍이 사방을 꽉 채우며 다가온다. 그 황산전망대 아래 왼쪽으로 작지만 단정한 공원과 옛 서원이 보인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함으로 절로 눈이 가게 만드는 이곳이 서원 건축의 전형이라 불리는 죽림서원이다. 앞으로는 금강의 줄기를, 뒤로는 황산의 안온함을 등지고 정연한 매무새로 앉아 있으니, 거니는 것만으로도 당시 선비의 고고한 풍류 한 자락을 맛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예학지조(禮學之祖)라 불리던 김장생의 죽림서원이다.
예로부터 충청도 사람을 일러 ‘충청도 양반’이라 하는데, 이는 충청도가 조선시대 기호유학의 본거지였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기호유학은 학문으로는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학문을 계승했고, 지역으로는 경기, 충청(호서), 호남 지방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파이다.
충청 지방에서도 단연 논산과 회덕(지금의 대전)이 기호유학의 중심지로 이는 연산의 김장생과 회덕의 송시열이라는 두 걸출한 유학자로부터 비롯되었다.
공자(孔子), 맹자(孟子)처럼 성씨 뒤에 ‘자子’가 붙은 사람들은 위대한 성인으로 존숭하여 그리 부르게 된 것인데,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자子’가 붙은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다. 정조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宋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송시열이 학문을 배운 사람 중 하나가 김장생이다.
강경과 가까운 연산에 살았던 김장생은 금강이 우뚝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황산에 서원을 짓고 강경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때 지은 서원이 현재의 죽림서원(처음에는 황산서원이라 불렸다가, 사액을 받은 후 죽림서원으로 바뀌었다)이다.
죽림서원은 『주자대전』의 석궁을 그대로 모방해 서원을 지어 이후 서원 건축양식의 전범을 제시하였다고도 한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 제향과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는데, 이를 위해 서원 건축에서는 신위를 모시는 사당과 강학을 위한 재(齋)가 한 공간 안에 배치되었다.
서원의 정문인 외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 건물이 강학 공간인 헌장당이고, 왼쪽 건물이 유생들이 기숙하던 서재이다. 사당은 별도의 담을 둘러 분리하였는데,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죽림사’라는 현판을 단 사당이 있다. 죽림사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양옆에 풍판을 배치하여 건물의 격을 높인 구조이다. 이 사당에는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예학의 높음과 시원함을 말해주는 임이정
당시 사계 김장생에 관한 이야기는 적지 않다. 어릴 때부터 무게 있게 행동하며 함부로 말을 내뱉거나 웃지 않은 사계 김장생이 어느 시골 마을에서 지낼 때였다.
한 사람이 와서 묻기를 “오늘 집안의 개가 새끼를 낳아 정결치 못하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그렇게 하라”고 답했다.
뒤이어 다른 사람이 와서 질문하기를 “집안에 아이가 태어났으나 제삿날을 당하였습니다. 예를 폐할 수는 없으므로 비록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고 답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선생의 말을 듣고 이상하여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 “앞의 사람은 정성이 없어 제사를 지내고자 하지 않고, 이 사람은 정성이 있어 제사를 지내고자 하니 예는 의식(儀式)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정성스러움에 있을 뿐이다”라 하였다. 예의 정신은 사라지고 격식화, 형식화된 예만 남은 작금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설화이다.
그 김장생이 임리(臨履)라는 시경의 글귀를 붙잡아 정자를 한 채 지으니 그곳이 바로 임이(리)정이다.
감히 호랑이와 싸우지 말라, 감히 황하를 건너지 말라. (不敢暴虎, 不敢馮河)
사람들은 하나만 알지,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하네. (人知其一, 莫知其他)
벌벌 떠네, 오들오들. 깊은 연못가에 서 있는 듯, 엷은 얼음 위를 걸어가듯.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冰)
- 『시경』, 「소아」
죽림서원 뒤로 병풍처럼 둘러선 대숲 사이에 작은 계단길이 있다. 길을 오르면 앞이 시원하여 금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뒤로는 강경의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정자 한 채가 나오니 바로 임이정이다.
김장생이 금강이 발아래로 흐르는 황산 마루에 세운 정자로, 이름은 정자이나 우리가 흔히 봐온 사방이 훤히 뚫린 정자와 달리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며 왼쪽 2칸은 대청으로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거처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지은 연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599년에 세상을 떠난 김장생의 스승 송익필이 남긴 ‘김장생의 황산정 시에서 차운하여 짓다’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 1599년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김장생이 황산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쟁 때 서둘러 지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스승을 사모하고, 후학을 양성하다, 팔괘정
황산전망대 바로 턱밑 임이정이 내려다보이는 중턱에 팔괘정이 있다. 우암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을 사모하여 그 뜻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이다.
팔괘(八卦)는 중국의 전설 속 인물인 복희씨가 황하에서 용마가 등에 지고 나온 그림을 보고 그렸다는 여덟 가지 괘로, 건(乾),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이다. 이 팔괘는 주역의 기본 괘로 사용되어 점복을 치는 데 쓰이는데, 건은 하늘, 태는 못, 리는 불, 진은 우레, 손은 바람, 감은 물, 간은 산, 곤은 땅을 상징한다.
스승 김장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에 팔괘정이란 이름을 붙였으니, 팔괘란 바로 김장생을 가리키는 것인 듯하다.
팔괘정 옆에 있는 암벽에는 송시열의 글씨라고 전해지는 몽괘벽(夢掛壁), 청초안(靑草岸)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 있는데, 몽괘라는 글자는 『주역』 「몽괘(蒙卦)」에서 가져온 글자로, 그 단전(彖傳)에 ‘몽매한 이를 바름으로 기르는 것이 성인을 만드는 공이다’라는 해석이 있다. 이는 송시열이 후학 양성의 뜻을 밝힌 것이다.
송시열의 9대손인 송병선이 1866년 이곳을 유람하고 나서 쓴 유람기에는 이 외에도 ‘삼계리(三桂里), 평주도(平疇島), 일감당(一鑑塘),도영암(倒影巖)’이 송시열의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몽괘벽과 청초안만 보인다.
팔괘정은 유명한 고전 『택리지』가 쓰인 곳이기도 하다. 이는 이중환이 직접 『택리지』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내가 황산강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팔괘정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한 바가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산천, 인물, 풍속, 정치 교화의 연혁, 치란득실의 잘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 차례를 엮어 기록한 것이다.
- 발문, 『택리지』
팔괘정에서 바라보는 금강은 참으로 넉넉하다. 절로 우리 산천과 사람들에게 대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강경은 이제 젓갈로 유명한 곳이다. 금강하구가 막혔음에도 강경이 젓갈로 유명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렇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앞서 둘러본 근대의 이야기처럼 이곳 강경사람들의 억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억셈이 단지 근대화의 풍랑 때문이 아니라 사람과 삶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마음 깊게 다졌던 곳이 이곳 강경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금강을 보며 다시 우리의 ‘예’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