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피크] 비정규직 철폐, 노동자 평등세상, 자주·민주·통일을 염원했던 박종태 열사의 서른아홉 불꽃같은 삶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시인이자 이웃의 삶을 기록하는 오도엽 작가가 쓴 책 ‘종태’(민중의소리 펴냄)다.
박종태는 1971년 11월 16일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서 박이봉, 차윤례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광주 동운초등학교, 서강중학교, 서강고등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1990년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후 자칭 ‘광주의 아들’이라며 집회로 달려 나갔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의 공안탄압에 맞서 싸웠고, 1996년 총학생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부경대 동문들에게 믿음직한 ‘전라도 투사’였지만 입담 좋고 인간미 넘치는 ‘동지’이기도 했다.
박종태는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내 해내고 마는 성격이었다. 그는 1학년 2학기 때 뒤늦게 풍물동아리 ‘울림패’에 들어가 초반엔 다른 동기들보다 실력이 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그해 겨울 삼천포에서 열린 12차 농악전수에서 끝내 상쇠를 전수받았다.
학생운동을 정리한 후엔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몇 년 동안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으나 늘 마음속에는 현장이 있었고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노동운동의 길로 자연스레 이끌었다. 25톤 화물차를 모는 특수고용노동자가 된 것이다. 그는 2003년 화물연대 부산지부 양산지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2004년 (주)인홍상사 지입으로 귀향해 인홍상사 생존권 쟁취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화물연대 광주지부 사무부장으로 활동했다. 2006년 3월 삼성 자본이 문자 한 통으로 50여 명의 화물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하자 50m 높이의 송전탑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전개해 구속됐다. 2007년 화물연대 중앙위원, 2008년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으로 활동했다.
박종태는 2009년 화물연대, 공공운수연맹 대의원이었다. 그해 1월 대한통운은 노조와 수수료 인상에 합의했다. 건당 920원이던 택배 수수료를 30원 인상하기로 했고, 2월 중 시행하기로 구두 합의를 마쳤다. 하지만 3월 15일 회사 측은 본사에서 수수료 40원이 인하돼 물건이 배달되고 있기 때문에 30원 인상합의는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3월 16일 노조 측은 합의서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회사에 항의하며 계약서상 회사 측에서 해야 하는 분류작업을 거부했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수수료 한 푼 없이 분류작업을 대신해왔다. 그러자 회사 측은 근무지 이탈이라며 18시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해고할 것이라는 문자를 노동자들에게 보냈다. 뿐만 아니라 18시까지라고 복귀를 통보했지만 18시가 되기 전에 회사 출입문을 봉쇄하고 78명의 노동자들을 계약서상에도 없는 근무지 이탈을 핑계로 집단 해고했다. 일방적인 문자 통보였다.
자신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각본대로 움직인 것이다. 회사 측은 출입문 봉쇄 외에도 4월 3일까지 정문 앞과 그 건너편에 집회를 신고해 노동자들의 집회를 막았고, 해고 노동자들의 대체 차량을 200여 대 준비해 놓았다. 다른 지역에서 온 차량에게는 내비게이션까지 구입해 지급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아울러 위수탁 계약을 통한 방식을 영업소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3월 18일 바로 영업소 모집 광고를 시작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이 기자회견과 출근 투쟁, 집하물건 전달투쟁을 진행하기 시작하자 3월 23일 회사 측은 임금 지급 중지 내용증명을 발급했다. 노동자들은 대한통운 자본의 폭력성과 악랄함에 저항해 4차에 걸친 화물노동자 총력투쟁결의대회를 진행했지만 이명박 정권은 박종태를 비롯한 노동자들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박종태는 수배의 어려움을 탓하지 않고 ‘해고자 전원 원직복직, 화물연대 사수’라는 소중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해고된 택배노동자들과 전국을 돌며 해고의 부당성을 알리고 함께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러던 중 그는 2009년 4월 30일 자신의 죽음이 부당한 해고 철회와 화물연대 사수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대한통운 대전지사 건너편 아카시아 동산에서 ‘대한통운은 노조탄압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몸에 걸고 나무에 목매어 자결했다.
그의 시신은 5월 3일 발견됐다. 그는 스스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보통 사람들의 특별하지 않은 권리’를 위해 목숨까지 던져야 하는 냉혹한 현실을 더욱더 일깨워 주었다.
박종태의 죽음 이후 수십 차례에 촛불문화제와 시민 선전전, 총력투쟁 결의대회 등이 진행됐다. 하지만 대한통운은 노동자들의 교섭 요청을 무시하고 운송사대표자협의회를 앞세워 화물연대를 기만했다. 정권도 노동자들을 연행, 구속하고 탄압하는데 그치지 않고 장례투쟁에 사용한 만장을 만드는데 쓰는 대나무를 배달한 운전자까지 조사하기에 이른다.
화물연대는 박종태의 죽음 이후 6월 11일 총파업을 비롯해 약 40여 일간 투쟁을 벌였지만 6월 15일 결국 대한통운의 요구대로 ‘화물연대’ 대신 ‘대한통운 광주지사 택배분회 분회장’ 명의로 합의서가 작성됐고, 3월 16일 해고계약해지된 대한통운 광주지사 소속 택배노동자 38명은 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의 장례식을 치른 후 업무에 복귀했다.
장례식은 6월 20일 박종태가 숨진 지 52일 만에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마당에서 전국노동자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시신은 광주 금남로에서 노제를 지낸 뒤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이 책은 ‘보통 사람들의 특별하지 않은 권리’를 위해 목숨까지 던져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치열한 삶과 투쟁만이 더 나은 사회를 앞당길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